Lined Notebook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 나영석

by 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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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자 평균수명은 84세, 남자 평균수명은 77세, 단순평균은 80세다. 오래도 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봇물처럼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들은 '평균수명이 이렇게 긴데, 너 그렇게 살아서 어떡할래?'라며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찔리려고 산 책인데, 왜 정작 콕 찔리면 푹 아프면서 심술이 툭 불거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레이스를 길다>라는 제목에서는 피부에 따뜻하게 와닿던 이야기가 자기계발서에서는 목에 걸린 생선가시마냥 신경만 쓰인다. 나영석PD라는 작가의 존재감이 변인인 건지.

여하튼 나영석PD는 보이는 라디오에서도 언급하겠지만(녹음도 했고, 뮤직비디오도 다 나열해 놨는데, 고작 디자인 좀 바꿔보겠다고 이 아직 업로드를 못 하고 있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드신 분이다. 연예인이 삼시 세끼 밥 지어먹는 내용을, 남들 고생하는 거 보면서 웃기 좋아하는 내 취향을 되돌아보도록, 심지어 최근에는 퀘스트 요소하지 활용하며, 지루하다 싶을 때는 귀여운 애완동물 보는 맛까지 쏠쏠하게 <삼시세끼>로 구현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연출자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든 사람들은 '캐릭터'가 생기지 않던가. 캐릭터를 잡아주고 그 부분을 연출해 주는 연출자라니. 나영석PD는 엿보기 좋아하는 인간 본성을 살살 긁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관련글: http://warakk.tistory.com/367)

게다가 프로그램이 예쁘다. 프로그램마다 디자인과 감성이 확실하다. 자막 내용을 보면 <신서유기>는 무심한 악동같고, <삼시세끼>는 따뜻한 여성같고, <꽃보다> 시리즈는 여행자가 누구든 청년같다. 디자인은 프로그램의 내용과 형식을 따라간다. 물론 본인이 다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총연출자가 피곤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책도 참 꼼꼼하게 썼다. 문학적으로 꼼꼼하다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프로그램을 보듯, 이 책도 그렇게 쓰여졌다. 이야기의 줄기는 크게 2가지. 1박 2일의 기획, 제작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한 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1박 2일이 마무리되고 아이슬란드에 다녀온 나영석PD의 여행기다. 두 가지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아이슬란드 여행기 이어) 그건 그렇고 손발 다 잘린채 입만 살아서 멀고 먼 아이슬란드에 제대로 갈 수나 있을지 덜컥 의문의 든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고. 일단 가보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5년간 내가 배운 건 이거 하나다.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

첫 촬영은 언제든 힘들다. 정해진 로드맵이 없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 잘되어가는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을 때마다 연기자들의 표정을 살피고 고개를 돌려 동료 스태프들의 표정을 살핀다. 웃으면서, 괜찮아, 걱정 마,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하고 서로 대답해준다. 그러면 또 힘을 얻어 한 발짝씩. 일단 준비해온 것을 믿고 밀어붙인다. (1박 2일 제작기 계속)

같은 상황을 물고 들어가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마무리짓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여행기가 길어져 지루할 법 하다 싶을 때면 1박2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분이 작가였다면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못하는 필력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 터. 하지만 이 책이 글로 된 영상물같은 느낌이라 약점은 오히려 매력이 됐다.

부모님 말씀으로 시작했으니 부모님 말씀으로 글을 끝내야 겠다. 요즘도 부모님은 잔소리삼매경이신데, 그 중 하나가 이거다. 인생은 마흔살 전후로 결정이 된다. 그러니 30대 후반쯤에는 한 번 돌아봐라. 어떤 인생을 살고 있나. 앞으로 이렇게 더 살아도 되나.


나영석PD가 쓴 이 책은 사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다. 그냥 1박 2일을 제작하고 아이슬란드 여행을 가며 겪은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그 글에서 출판사가,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게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체온과 비슷한 조언일 뿐. 그래서 출판사에서 이 책의 셀링포인트를 이렇게 잡은 것일테다.

흘러가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불안하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는 싫다. 그럼 스스로를 위안하는 셈 치고 이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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