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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by 리비 :)

* '장자' 오강남 풀이, '외디푸스왕' 소포클레스를 기반으로
** 이전 글을 다시 업로드합니다. 

파스칼이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우리에게 수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파스칼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발명가, 신학자다. 그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한계상황을 제시하는 한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로 인간을 정의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이 생각하는 갈대라면, ‘사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장자의 「장자」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이문세의 노래 「시를 위한 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담담하게 읊는 시와 같은 노래이다. 이 노래 중에는 '이 생명 이제 저물어요. …노을 진 구름과 언덕으로 데려가줘요. 나의 별들도 가을로 사라져'라는 가사가 있다. 내 별들도 나와 같이 가을로 모두 사라진다는 가사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살아서 내가 남겨두었던 소중했던 것은 죽어서 가져갈 수가 없다. 파스칼이 말한 한계상황 중 죽음이 닥쳐왔을 때, 인간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해서 그저 허무함뿐인 존재일까? 남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살더라도, 인간은 존재의 가치가 가질 수 있다. 내가 살았다는 '사실'이 아무에게 기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 그 자체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현실 세계에 이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현실에 강아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는 자아가 있다는 것까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자의 호접지몽

「장자」 중 제물론에서는 만물이 하나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를 차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밝힌다. 이 제물론 중에서도 장자는 호접지몽을 통해 장주가 나비된 꿈과 나비가 장주된 꿈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고사를 통해 생각과 존재를 구별치 않는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인생이 하루에 꾸는 나비의 꿈이었다 한들, 심지어 그 어떤 것이 실존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갈지라도, 장주가 꿈을 꿨고 그 속에서 뭔가를 느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인간이 살아가면서 했던 생각들은 항상 그 인간의 내면에 남아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남겨둔 생각을 토대로 어떤 일을 이루고 싶어 한다. 사유의 결정체는 손으로 만질 수는 없으나 우리의 내면에 남기 때문에 느끼고 생각한 것이 많은 삶은 허무하지 않다.

호접지몽에서 장주와 나비는 외형이 다르지만 생각을 완벽하게 공유했다. 둘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나,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꿈의 시작과 끝이 없이 한 가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장자는 호접지몽을 통해 실존은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차이가 있을지라도 한 가지 의식을 공유하면서 형체만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물화를 말하고 있다. 외형이 다르더라도 작은 것은 큰 것에 포함될 수 있다. 완벽하게 달라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대립하는 생각이라도 나와 상대방의 생각의 무게나 질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른 지점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의미로서의 제물론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일 것이다.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

삶의 초점을 '남는 것'에 맞추면 삶이 허무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느낀 것, 살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인간의 삶은 허무하지 않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무형의 증거이고, 모든 존재들이 하나로 연관되어있다는 제물론의 사상에 비춰볼 때, 각각의 존재와 생각은 모두 인정받아야 하고 고귀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허무하니 삶에 목매고 아등바등 거리는 우리는 모두 저급하다는 철학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철학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고, 이런 말을 믿고 따를 때도 있다. 다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철학자들의 철학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들이 이룬 단계를 지나서 그들의 불완전함을 깨닫기에는 각자의 능력과 남은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물론 이는 완전한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봤을 때, 모든 생각들은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을 부정하면 어떤 생각은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궁극적인 생각이나 경지가 있긴 할 것이다. 단지 인간이 그 궁극을 찾아갈 수가 없을 뿐이다. 궁극을 찾아가되 절대 궁극에 도달하지는 못 할, 비극적이지만 의지가 강한 존재들이 바로 생각하는 인간들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 신이 정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다다랐다. 우리 모두는 소포클레스가 그린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 같은 인물인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

표면적으로 오이디푸스가 추구한 것은 신이 부여한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개척하는 삶이다. 인간의 삶이 생각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고 모든 인간들은 생각하고 느끼며 사는 것을 목표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외부에서 주어진 깨달음을 거부하고 만물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 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서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할 것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은 일종의 장애물이자 거부해야 할 외부로부터 주어진 사실이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를 거부했고, 모든 사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운명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 역시 우리만의 삶을 살면서 자력으로 찾은 삶의 진리를 때로는 궁극적인 철학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모든 선택이 자신을 운명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건들을 대면하면서 보고 느꼈던 것들이 진리라고 여겼으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보면 이러한 진리가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되는 종착역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좌절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눈이 먼 채로 길을 떠난다. 우리도 적지 않은 것을 느끼고 살아왔음에도 궁극적인 진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계속해서 또 다른 앎을 찾기 위해 계속 살아간다.

우리가 고전인 장자의 「장자」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알 수 있는 사유의 원형은 삶의 원동과 좌절의 반복이다. 생각하고 느끼는 작업인 사유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기는 하지만, 사유에 의한 앎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기에 인간은 좌절한다. 하지만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진리가 있음을 항상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에 조금이라도 다다르기 위해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다시 일어나 생각하고 느끼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궁극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생각들과 사실들 사이에서 흔들린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약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한다. 종착역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약한 만큼 귀한 존재도 될 수 있다. 글의 시작에서 파스칼의 명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를 밝혔던 것은 이 말이 이런 인간의 유약함과 고귀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장자」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사람이 가진 유한과 무한, 강함과 약함의 근본을 느낄 수 있어, 우리로 하여금 생각이 결여된 현대사회에서 사유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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