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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 정이현책 2014. 5. 29. 22:26
밍밍이라는 이름은 지난번 생일에 만났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라오밍, 늙은 밍 아저씨라고 부르라던 엄마의 중국인 친구. 그가 선물해준 향수를 아이는 책상서랍 맨 아래칸에 넣어 두었다. 이따금 뚜껑을 열어 레몬향을 맡아보기도 했다.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스프레이를 손목에 가져다댔으나, 노즐을 누르는 대신 반추명한 살갗 밑으로 곧게 뻗은 실핏줄들만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가늘고 흐리고 푸르스름한 그 선들을 보고 있으면 얼음장 아래 누워 잠든 실뱀을 바라보는 것처럼 왠지 슬퍼졌다.
전에 쓰던 손때 묻은 키보드와 모니터를 어디다 치웠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미안하게. 아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는 새 컴퓨터와 천천히 정을 들여갔다. 쭈뼛쭈뼛, 조심조심, 언젠가부터 새 바이올린이나 새 구두에게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정이현의 소설 <너는 모른다>
사실 정이현의 대표작 <달콤한 나의 도시>는 좁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20, 30대 여성에 대한 이야기, 다소 실망스러웠던 탓에 <너는 모른다>를 선뜻 읽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목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첫 문장에 눈을 맞췄다. 흡입력은 강했다. 한 문장을 읽어내려가기 아까울 정도로 각 인물의 감정이 촘촘하게 새겨진 소설이다.
가족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5명의 개인, 다른 한 명의 타인. 갑자기 일어난 납치사건을 다뤘다.
이번 작품은 소름끼치도록 불안하고 무서운 이야기 속에 사람의 의미를 풀어놓은 특이한 소설이다. 표지에서도 미묘한 불안감,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소설 제목의 타이포그라피라던가, 색깔 배치부터가 그렇다.
내용을 읽다 보면 더 무섭다. 나이와 처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눈물 흘리게 된다. 외로움과 결핍에 대응하는 개인의 다양한 반응도 묘사된다. 광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이 생긴다던가, 배타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던가.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이 그대로 반영된 부분이다.
특히 위에 발췌한 저 부분들. 소설 중 가장 어린 등장인물 유지의 감정이다. 외로움에 어린 시절부터 길들여진 아이가 컴퓨터에, 바이올린에 정을 들이는 문장, 그리고 어린 아이가 자기 손목의 푸르스름한 정맥을 보며 빠지는 우울감을 묘사한 문장이다. 산다는 게 슬프다는 닳고 닳은 감정을 왜 이 아이가 느껴야 하는걸까. 이 문장을 읽고 내 손목을 들여다 봤다. 세상에, 어떻게 초등학생 아이가 이런 감정까지 느낄 정도로 외로울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본인의 외로움에 지쳐 유지까지 외로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주변인물들에게 화가 좀 났다.
그러다가도, 원체 외로운 게 사람인지라, 외로움은 사람에게 약으로 쓰일 수 있는 독약같은 것인지라 안쓰러워지기도 했지만.
한때 몹시 비겁했던 적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껏 비겁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덧없는 틀 안에다 인생을 통째로 헌납하지 않을 권리, 익명의 자유를 비밀스레 뽐낼 권리가 제 손에 있는 줄만 알았다. 삶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내벽에는 몇 개의 구멍들만이 착각처럼 남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숭숭 뚫린 빈칸을 이제 와서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그것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로 믿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답이 아님을 작가는 말한다.
결국 힘내라고 응원하게 된다. '너희가 날 알려고 하지 않잖아'라는 핑계를 직시하고, 비겁함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외로움의 무게를 조금 덜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아무에게도 귀속되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으며,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 인생이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누가 말하던가. 이는 혼자서도 오롯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택하는 자기방어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프기 싫어서 피하는 것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솔직하게 말하고, 기대고, 기대해 보는 것이 비겁하지 않은 인생살이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솔직해 지는 것도.
가장 타인이었던 이가 가장 가까이 다가올 때, 진심이 맞닿는 순간이란 그런 때일까. 그래서 이 소설에서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이는 누구일까. 무섭도록 두려운 결말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동안 말을 잃게 했다.
정이현이 말하는 인간의 존재, 마음의 맞닿음이란 어떤 것인지 한 번은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정이현의 대표작이라는 <꿈꾸는 나의 도시>의 안 좋은 이미지를 한 번에 날려버릴만한 좋은 작품이었다. 인간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관찰해서 벼려냈다. 두려워하고, 눈물 흘리고, 마음 깊이 좌절하고, 회복하는, 행복함을 뺀 많은 감정들이 녹아있다.
남는 사람의 상실을 생각하라는 동생의 말이 항상 이유가 됐다. 그런데 라오밍에게는 '밍밍이 없어서 슬퍼', '밍밍이 보고싶어'라는 말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게 너무나 무섭고, 참 서러웠고, 슬펐다.
정말 너는, 나는, 우리는, 사람을, 자신을,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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