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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시계공 | 리처드 도킨스

by 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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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신학서적이다. 신학서적에 적힌 글자를 보면서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언어 해석방법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데, 굳이 진화론이 옳고 창조론이 그른지 판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나를 누가 만들었던 어차피 드는 생각은 비슷한데.


이 책에 따르면 진화론은 생존확률을 높이려는 의도는 있으나 어떤 구체적인 생물체의 형태를 정해놓고 그것에 맞춰가려는 목적성은 없다고 한다.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에서 시계공 논증을 제안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시계는 갑자기 뚝 떨어져서 들판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부속품들이 우연히 모여서 만들어질 확률은 0에 수렴하고 있다. 하물며 시계의 출연도 이러한데, 시계보다도 더 복잡한 기관을 가진 생명체들이 우연히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는 것이 윌리엄 페일리의 주장이다. 고로 어떤 지성체가 생명의 탄생에 관여했으며, 그 지성체가 바로 조물주라는 것이 페일리의 가설이다.

진화론 역시 시계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단, 현 시점에서 존재하는 생명체의 이전 형태가 틀림없이 존재하며, 생명체는 점진적으로 바뀌어 나간다는 것이 진화론의 내용이다. 그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한다. 

창조론에서 인간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조물주가 철저한 설계를 통해 기관을 디자인했다는 가설을 세웠다면, 진화론에서는 애당초 효율적인 기관을 위한 디자인은 없었으며, 그때그때에 맞춰가는 적응에 따른 변화만이 있을 뿐이고 그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한다. 더불어 진화론은 변화가 생긴 다양한 생물체들은 ‘생존’에 의해서 선택을 받고, 그 선택은 지극히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 유발되는 행운 정도로 생각한다.

이런 맥락으로 확률적으로만 보면, 현재 살아있는 생물체들은 기적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제시된 반박이라는 것이라고 리처드 도킨스는 주장한다.


인간의 호흡기는 매우 불합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 무척추동물은 기도와 식도가 교차하지 않으므로 질식의 위험이 없지만, 인간은 기도와 식도가 교차하고 있어서 질식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조물주가 시계수리공으로서 기능을 했다면,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설계된 디자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물주의 창조 근거로써 살아가는 우리들의 몸에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기관들이 다소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생물체가 완벽하게 설계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반증한다.

복잡한 기관이 우연히 만들어졌을 리가 없으니 설계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창조론의 주장은, 복잡하게 만들어졌으나 그 설계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실례를 드는 진화론에 그 정당성이 약간은 훼손당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변화 중에 ‘선택’은 무엇일까? 선택에는 자연 선택과 성 선택이 있다.

자연선택이란 환경의 변화에 대해 잘 반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군비확장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들을 모두 포함해, 어떤 DNA가 수직적인 전달에 성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개체의 생존율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개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DNA의 생존율을 높이는 것이 자연 선택이다.

성 선택은 번식하기 위한 동족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음을 뜻한다. 자연 선택에서 선택받은 개체도 성 선택에서 실패하면 DNA의 생존율을 높일 수 없다. 따라서 성 선택의 확률을 높이도록 개체들은 자신의 매력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연 선택의 확률을 높이려는 전략과 성 선택의 확률을 높이려는 전략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잡아야 하는 이 두 토끼 가운데서,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있다. 개체 생존율을 낮추는 형질이 번식의 가능성을 높이면, 그 형질은 두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협상을 한다. 개체의 생존율과 번식의 가능성을 적당한 선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선택은 장기적인 면으로 유리한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 세대에서 단기효율적인 것을 선호한다. 이런 특성을 가진 '선택' 때문에 비효율적인 결과물이 나오게 되고, 비효율적인 결과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진화론의 큰 힘이다.


물론 생명의 등장을 설명하는 진화론이 무조건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진화론이 현재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가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진화론도 각각 약간씩 주장을 달리한다.

어떤 진화론자는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다. 따라서 세계는 인간의 수단으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화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매우 이기적이며 인간의 자만심에서 나온 허영일 뿐이다. 리처드 도킨슨이 설명하는 것은 인간은 진화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니지만, 인간 역시 진화를 겪고 있으므로 진화에서 상위 생명체는 없고 모든 생명체는 같은 층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발전 될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의 탄생을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다른 종의 생명체로 볼 수 있을 만큼 다르며, 역사 속에서 비추어진 이들 종교의 모습 역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다툼을 벌여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세 종교는 같은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세 종교의 뿌리는 유대교다. 현재까지도 제일 그 모습이 변하지 않은 유대교는 살아있는 화석으로도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유대인인 예수 덕분에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변형되어 나온 종교이고, 이슬람교는 무함메드가 자신이 받은 신의 계시가 기독교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와 그 기조를 같이하다가, 후에 독립한 종교다.

이렇게 3가지 큰 종을 만들고서, 각 종교 안에는 수많은 종파가 생긴다. 이러한 종파들끼리의 경쟁으로 가장 큰 종파가 생기고, 사라지는 종파가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 신빙성 없는 종파들과 사이비 종교들은 신도가 감소하거나 사회적 장치에 의해 걸러지게 된다. 교리가 잘 이어져서 역사가 흘러도 이어지는 것을 개체의 생존율로,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종교를 선택하는 것을 성 선택에서의 매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서와 자연과학서는 쓰인 목적이 다르므로 해석방법 역시 달라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은 매우 다르다. 만약 성서가 과학적인 언어로 쓰인 객관적인 글이라면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성서 스스로 오류를 내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랜시간 이어져왔을 성서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똑같이 귀중하게 태어난다는 것을, 성서는 창세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리처드 도킨슨의 생각과 맞물리고 있다. 리처드 도킨슨 역시 진화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 일부로써만 인간을 생각하고 있다. 사회학적으로는 모든 생명체는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인 형태는 없다는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지만, 사회학적으로는 그 기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지 않알까.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관계는 많은 글에서 다루는 흥미로운 주제다. 생명체의 등장에 대해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학설들이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상당히 다르므로 대립관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생각되는 것 같다. 진화론은 과학적인 해석을 주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현시대에 상당히 이해할 만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생명체의 등장을 설명한다.

과학은 최선의 가설을 제시하는 학설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사장하는 학문이다. 상당히 효율적임이 틀림없으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가치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너무 단편적인 면도 없지 않다. 과학적인 논리에서의 최선의 가르침과 사회학적인 논리에서의 두 학설의 수렴은 틀림없이 다른 논리이다.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기적인 진화론이 아니라 세상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상대적인 진화론이 이 책에서 설명하는 일면이고, 성서 역시 모든 생명은 똑같이 귀중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자가 아닌 우리는 우리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서 과학적인 눈을 가지고 대립하는 면만을 관찰할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폭넓고 윤리적인 눈을 가지고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면을 발견해 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진화론은 생명을 설명하는 현존하는 최선의 가설이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는 기점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생물학의 학설로서만이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는 사고체계로서 기능을 하는 진화론을 일반인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큰 공을 세우고 있다.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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