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그날의 분위기 [2016]

by 리비 :)

그런 영화들이 있다. 볼 때는 푸하하 웃으면서 또는 흐음 하면서 잘 봤는데 보고 나서 내가 이 영화를 왜 봤나 싶은 영화들. <그날의 분위기>가 딱 그렇다. 본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의 주제. 문채원의 대사가 가장 정확하다, "그거 성희롱이에요, 범죄라고요, 범죄!" 일단 그건 완전 맞고, 이 모든 발단이 유연석이니까 짜증이 날 듯 말 듯한 기분으로 보는 거고. 사실은 극본이 제정신인 건가 싶었고. 뭐 웃자고 던지는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현실성은 없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시작점부터가 <원스> <비포 선라이즈> 이런 쪽은 아니라는 말이다.  <비포 선라이즈> 말고, 이 영화는 대놓고 말하자고 등 떠미는 뻔한 로맨틱 코메디인 <어글리 트루스>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배우만큼은 산다. 문채원은 예쁘고 맑고 귀엽다. <오늘의 연애>에서 나왔던 모습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귀엽다. 유연석은 능글능글한 말투며 행동거지가 제모습같다. 이 두 배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둘이 있으면 참 뿌듯하다. 배우의 매력도는 너무나도 좋은데, 캐릭터는 잘 모르겠다.


문채원이 분한 배수정은 그래도 낫다. 노트북에도 의리와 기억을 부여하며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일면식 하나 없는 상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 짓는, 10년 사귄 남자친구가 상처받을까봐 힘들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못 내 본, 첫사랑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못해보고 친구에게 장가보내는 여자라는 설명을 꼼꼼하게 깔았다. 캐릭터에 대한 판단은 하고 싶지 않다! 쫌!


유연석 분의 김재현은 뭔가 싶다. 농구를 하다가 부상으로 그만둠. 그래서 후배 강진철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하며 그의 성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함. 매너 좋고 아이에게 친절한 성품임.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정작 왜 저렇게 망나니 바람둥이가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거니까 그냥 보라고? 아니, 극에 '그냥'이 어디 있어. 보는 내내 "아니, 대체 왜?"라는 생각만 하게 된다. 


굳이 이야기에 도움 되지 않는 남자 조연을 코미디 우려내는 용도로 습관처럼 붙여놓은 이유도 잘 모르겠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새로운 걸 찾고 싶은 건 아닌데, 사족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주연들이 이렇게 잘 어울리고 충분히 피식거리게 되는데 굳이 왜 흐름을 끊어가며 강선배를 넣은 거지? 러닝타임이 안 나와서? 강선배가 나오는 모든 씬들에서 다시 매번 "대체 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영화는 연출의 실패다. 주인공의 이야기가, 조연의 등장이, 사건의 개연성이 흩어진 결과, 이 영화는 우연이 만들어낸 판타지를 현실이라고 목적도 두서도 없이 우겨대는 모양새가 됐다. 아니, 그래서 '그날의 분위기'가 뭐가 왜 언제 중요한건가? 영화는 제목부터 '그날의 분위기'를 던져놓고 뭐가 '그날의 분위기'인지, 왜 '그날의 분위기'가 이들에게 의미가 있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로맨스 영화의 장점은 간질거리긴 해도 예쁜 대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억에 남는 대사가 "성희롱이에요, 범죄라고요, 범죄"가 제일 우선이었다. 극의 장르를 생각하면 대사도 그다지 좋은게 없었다는 거다. '그날이 매일이 되길' '흔들릴 때는 첫마음이 이끄는대로' 정도도 극에서 강조하니까 기억에 남긴 남는데... 잘 모르겠다. 극에서 강조했으니까 기억에 남는거지 그 앞뒤 시나리오가 대사를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유연석, 문채원의 매력이 그나마 영화를 살린거고, 만약 두 배우의 연기가 아쉽다면 그건 연출이 방향성을 못 줬던 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는 좋은 곡을 선곡해서 사용했고(특히, 에드 시런 "Photograph"), 이 추운 겨울에 보는 가을 날의 예쁜 부산 정경이 마음을 풀어준다. 부산이 참 예쁜 도시인 것 같다. 바다도 있고, 볕 좋은 날에는 참 예쁘고.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틀어놓고 다른 일 하면서 적막함을 죽이려고 보는 영화 정도. 그래도 뭐, 날도 추운 연휴인데 기분전환 삼아 보는거지. 싶다가도 내가 이 영화를 왜 봤는지 모르겠음. 미쳤나봄.


그래도 유연석은 악역만 기억에 남기다가 칠봉이가 됐고, 칠봉이에서 능글거리는 사기꾼이 됐다가, 칠봉이와 능글거리는 사기꾼을 합해놓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손해 안 본 사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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