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종교로 세계읽기 | 이찬수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학원을 다닐 때 늦은 밤, 옥상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에 교회의 십자가가 빛나고 있다. 한 번 세어봤었는데, 대략 20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자리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치 치고는 매우 높은 수치이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에서 사찰을 방문하기 마련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수학여행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관람했을 것이고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에 안도를 느낀다. 또 누구나 한 번쯤은 친구와 명동성당에 들러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년이 다가오면 신년 운세를 보며 새로운 다짐을 하고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송되는 무당들의 이야기를 보며 무속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도 한다. 우리 생활에는 알게 모르게 여러 신앙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들이 터를 잡고 있다. 다양한 종교들이 터를 잡고 있다는 말은 국내에 들어와있는 외래종교, 혹은 토종 종교들이 수적으로 매우 다양하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 셀 수도 없이 많은 종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인 대부분은 ‘신도’라고 불리는 종교를 믿고 있고, 일부는 ‘신도’를 믿는 동시에 불교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의 경우에는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종교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편은 아니라 한다. 이러한 일본의 경우, 많은 종류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하다고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경우 가톨릭교, 개신교, 불교의 신자들이 비교적 고루 분포하는 편이다. 또 미신이라 여겨지기도 하는 무속신앙에 있어서도 친근하게 느낀다.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는 나라, 종교의 선택에 있어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자유로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종교란 과연 무엇 일까. 각 종교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종교에 대해 설명한다. 동서양의 종교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동양에서의 종교는 일종의 교화사상으로 올바르게 살기 위한 가르침, 수련의 방법에 가깝다. 반면 서양에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받고 신의 곁으로 가기 위한 방법으로 반성의 도구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종교는 다른 것 인가. 만약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면 우리에게 기독교가 뿌리깊게 자리하지 못했을 것이고, 서양에 최근 불교가 퍼지는 현상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로 표현되거나 신도들에게 바라는 모습은 다르지만, 사실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종교는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또한 각 종교에서 바라는 인성적인 모습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아주 단편적으로 말하면, 이 책에서 다루는 그 어떤 종교도 ‘남을 해하고 살육하며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한 예였지만, 모든 종교들은 어떠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이상적인 상태에 가까워지길 원하는 믿음은 같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탈무드. 지혜의 결정체라 불리는 책이다. 또한 어린이용 만화 탈무드, 성인들이 읽을만한 탈무드, 간추려낸 탈무드 등등 갖가지 모습의 책들이 나오고 있다.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 경전을 읽어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기독교신자가 아닌 사람이 성서를 읽기 또한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종교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양서적으로써 한 번씩은 읽어보고자 했을 탈무드는 유대교의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외로 유대교는 멀기만 한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교는 유일신 사상을 가진 최초의 종교이다. 인간은 자연현상에 대해 경외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자연현상들을 설명하고 싶어했고, 두려운 자연현상에 대해 대처하고자 했다. 자연과학의 설명이 나오기 전, 사람들은 자연현상 뒤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신’께 빎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바랬다. 따라서 겨울이면 데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여 봄이 오길 기원했을 것이다. 천둥이 치면 제우스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냈을지도 모른다. 많은 신들이 인류에게 깃들어 있다고 믿을 때, 유대교는 유일신 사상을 생각 해 냈다. 모든 것을 야훼께서 관장하신다고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이는 매우 획기적인 것으로 이후 종교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유대교는 유난히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던 종교이다. 그러한 고난들 속에서 꽃피운 종교이기 때문에 야훼에 대한 목표의식이 있다. 야훼께서 자기 민족에게 그러한 고난을 내리신 것은 그의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또한 자신들은 야훼가 만드신 길이기에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길을 따라가게 되고 특정한 예배나 경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종교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서양문명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예술작품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고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이다. 하지만 애당초에 예수가 그리스도로 태어났기에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믿고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기 보다는, 자기자신의 내면에는 인간적인 고뇌와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소명의식에 따라 어려운 행동을 해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예수는 자신이 보듬고자 했던 대중들의 요구로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로마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를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훗날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는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믿고 소명을 다한 예수는 죽음 후에 부활하게 된다. 이로써 예수는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종교로써의 기반도 다져진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라는 윤동주시인의 「서시」구절을 읽으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떠오른다. 신의 다스림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뿌리는 같은 곳에 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예수를 지칭하는 그리스도라는 것 자체는 메시아와 일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우혁의 『퇴마록』이라는 소설에는 많은 종교들이 허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적그리스도’는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자로 그려진다. 그 책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때, 그리스도의 반대 개념으로 ‘적그리스도’를 연상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역할은 세상을 개혁 또는 구원하는 자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메시아는 왕이라는 뜻의 유대 어이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타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서 구해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자신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사람인 메시아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였고, 그런 면에서 결국 같은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그 주위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유일신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평생을 유일신 하나님을 알리는데 보낸 사람이다. 같은 유대교 사상에서 그리스도교가 나왔고 그에서 이슬람교가 나왔다. 하지만 현재 세계정세에서 보이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깊은 갈등은 그러한 점을 무색하게 한다.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 예수에게 사상적 뿌리가 되었던 요한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다. 높은 사람이 낮아져서 평등을 이뤄야 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교가 더 잘 실현했을까, 이슬람이 더 잘 실현했을까? 종교의 비교는 의미가 없는 작업이지만 한 번쯤은 필요하다. 비교함으로써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아래 모두는 평등하다’는 이슬람 쪽이 더 평등사상에는 가깝지 않을까. 신 앞에 너와 내가 모두 평등하기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과 나에게 남이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대교와 그 유대교로부터 태어난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을 살펴보았다. 이 종교들은 종교적 진화론에 입각한 생명체들에 비유할 수 있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확실히 다른 종으로 진화한 것이다. 생명체들은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하지만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한다. 또 아주 조그만 차이가 후에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조그만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 뿌리가 하나이더라도 역사적인 사건, 인물의 출현,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세부적으로 갈라지고 그 당시에는 그저 이단으로 여겨져 서로를 탄압하더라도, 훗날 전혀 다른 종교로 발전하여 그 나름의 가르침이 생기는 것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도 그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그 뿌리는 유대교에 두고 있지만 아주 조금씩 다른 사상체계를 가지고 발전해나간 까닭에 지금은 전혀 달라 보이는 종교를 창조해낸 것이다.

세상에 이해하기 쉬운 종교는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위에서 만나기는 쉽지만 가장 난해하게 다가오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어렸을 때 천수경을 본 적이 있다. 손오공이 도술을 쓸 때나 외움직한 발음들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었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종교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비싼 밥 먹었으니 올바른 인간답게 잘 살아라’라는 말은 시골에 내려가서 식사를 할 때 외 조모께서 하시던 말씀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교적 정신이 약간 깃든 말이다. 다른 무언가에게 비싼 빚을 졌으니 그만큼 빚을 갚도록 노력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불교는 이렇듯 모든 생명체들은 다른 생명체들에게 기대어 살아간다고 말한다. 따라서 ‘나’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꿈 속에서 외쳤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무슨 말 인가. 정작 나로서도 아집이 강한 사람을 보고 스치듯 생각하는 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들에 의해 정의되고 있다면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것’들 역시 ‘나’로 인해 정의되고 있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거만함에서 나오는 자기존중이 아니다. 책임을 온전히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석가모니야 말로 대단한 선구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칠 한 사람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 조모께서는 그리스도교의 신자셨다. 하지만 꼭 제사를 지냈다. 역시 그리스도교의 신자이신 큰어머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제사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척당해야 하는가. 조상에게 인사를 올리고 감사하는 것이 우상숭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한국의 생활문화라는 편에 더 가깝다. 인, 의, 예, 충, 효는 한국인 사상 깊숙이 뿌리내려있고 오랜 시간 동안 제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모습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교문화는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을 지탱해온 기둥이다. 자신의 종교와 배척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무조건 폐지한 후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이다.

한국에서 아주 대표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종교는 그리스도교, 불교 정도가 될 것이다. 일반 대중이 보았을 때, 한국 내의 두 종교는 많은 시간 동안 첨예하게 대립 해 왔다. 물론 같은 종교 내의 다른 종파 간 다툼도 민감하다. 하물며 타 종교간의 의견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부딪히고 금이 가고 다시 붙고 하는 정반합을 거쳐 이해할 수 있는 한 각 종교들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올바른 종교는 절대 사람을 옳지 못한 길로 유도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가치와 기준으로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생물체가 진화를 함으로써 많은 종들을 만들어 내도 그들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 하나로 집결되듯, 종교들이 서로 같은, 혹은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분화되어 각 종교로 만들어 져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인간을 올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과 생각, 그리고 세계화를 위한 마음으로, 우리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정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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