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싱글맨 single man | 2009

by 리비 :)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사랑하는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던, 그래서 더욱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에 슬퍼하며 삶을 부정하는 조지의 일상은 기계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선물로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그저 죽음으로 가는 시간이 하루 더 길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조지가 일어나는 첫 장면부터 이 영화는 푸른색이 감도는 회색빛이다. 그가 일어나는 곳은 그냥 집 house 가 아닌 보금자리 home 여야 하는데도,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붙일 곳이 없다. 또 현재 now 와 나 am 를 애써 부정하며 독백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들은 대부분 회색 빛이다.

많은 로맨틱코미디 영화에서 가벼운 연기를 보여줬던 콜린 퍼스. 그는 100분 가량의 영화를 혼자서 온전히 어깨에 지고 나아간다. 표정은 많지 않다. 다만 그가 겪었던 인생의 한 때를, 과거가 된 수많은 현재를 눈빛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붉은 색이 섞이는 조명은 대부분 조지에게 기억에 남을 장면, 삶에 대한 애착이 조금이라도 느껴질만한 대상이 있을 때 사용된다. 다소 일상적이라서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을 상황에서조차 혈색이 도는 색감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사무에서 벗어난 평범한 대화에서도 위로를 받는 그의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게 된다. 가끔씩 색온도(캘빈값)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장면도 있다. 조지가 죽음에 대한 본능, 타나토스에 잡혀있다는 상황을 토대로 느껴보면 에로스를 표현하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글쎄, 그렇게 단편적으로 해석해버리기엔 이 캐릭터가 가진 배경이나 특성이 안타깝지만, 일단은 극의 흐름을 통해 받은 첫인상은 그렇다.

Sometimes awful things have their own kind of beauty.

원래 이 대사는 스페인 억양을 가진 배우가 영어로 말하다가 갑자기 스페인어로 던지는 대사다. 마치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라고 말하고 싶은 듯 마음에 다가오는 대사 중 하나였다. (여담인데, 스페인어가 이렇게 우수에 찬 언어인지 이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스페인 청년 카를로스의 이 말을 듣고,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본 적이 없었던 노을을 바라보며 그는 잠시 담배를 나눠 피운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에게 카를로스와 나눈 짧은 시간, 붉은 노을은 어떤 의미였을까?

조지는 과거의 사랑을 극복하는 날이기 때문에 오늘이 심각한 날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등에 카를로스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조지는 이만 가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복잡했다. 카를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이 당시의 LA의 배경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카를로스는 어머니에게 미국인 애인이 있어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마스크만으로 미국에 캐스팅됐다가 억양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랑은 버스와 같다는 어머니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인물이다. 조지는 십 몇 년간 사랑해왔던 연인을 잃었고, 그 상실감으로 오랜 시간동안 힘들어하다 죽음을 결심한 인물이다. 아마 카를로스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자신이 경험했고 겪고 있는 감정과 달랐기 때문에, 조지의 죽은 연인인 짐을 그저 떠나간 버스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만 들 뿐이다.

We're invisible, don't you know that?

주점에서 케니가 들어온다. 그는 조지의 영문학수업을 듣는 제자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청년과 조지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관객에게는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인상이 깊게 남았을 법 하다. 회색이었던 화면이 갑자기 혈색이 도는 화면으로 바뀌었던 것은 조지가 가졌던 케니에 대한 첫인상이 반영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옆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 금발의 루이스가 케니에게 귓속말을 하는 순간 색들이 붉은 빛을 띠며 살아났던 것은 케니에 대한 호기심 혹은 거슬림이라는 새로운 감정 덕분인 것 같다. 호기심, 사랑, 질투, 그 어떤 감정도 살아있기에 느끼는 것일테니까.

그리고 하루 해가 진 후, 자살하려다가 술이 떨어진 것을 발견한 조지가 술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케니가 따라 들어온다. (아마도.) 그가 들어온 후 갑자기 화면은 약하게 붉은 빛이 돈다. 그리고 조지는 가지고 가려고 주문했던 한 병의 술을 취소하고 두 잔의 스카치를 주문해서 케니와 펍에 앉는다. 이야기를 하며 자신과 과거의 연인 짐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청년 케니를 발견하게 되고, 케니가 이 대사를 던진다. We're invisible, don't you know that? 과거에 짐에게 조지가 했던 그 말을 케니가 짐에게 들려준 것이다.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이야.'라는 뉘앙스로 조지가 짐에게 했을법한 그 말, 하지만 짐은 '우리는 자유로워.'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말, 그 말을 해변에서 케니가 조지에게 전한다.

조지는 케니에게 루이스와의 관계를 물어보고, 케니는 이에 대해 대답한다. (짐과 조지의 회상장면에서 나왔던 것과 비슷한 대화다.) 조지는 이제 자신이 짐에게 줬던 사랑만큼을 케니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짐의 권총을 품에 숨기고 잠이 든 케니를 발견하고, 짐은 웃는다. 뭐, 완전히 밝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쁘게 웃는다. 그리고 권총을 집어 들어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근다.

영화의 감독, 톰포드는 유명 디자이너다. 디자인 계열의 엘리트코스라는 파슨스를 나왔고, 구찌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톰 포드라는 예쁜 뿔테가 유명한 브랜드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의상도 예쁘고 교수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하지만 고지식해보이지는 않았던 예쁜 모양의 뿔테도 아름답다.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주는 여성들의 헤어나 메이크업, 의상도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파슨스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했던 덕인지 배경이 되는 집, 집 안에 배치된 소품들도 하나하나 다 인상깊다.

하지만 그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소품과 패션, 세트 인테리어에 집중되어 있다고 느끼기에는 대본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개성, 그 대본을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센스, 카메라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대사들,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많은 것은 원작인 책을 쓴 작가의 역량이겠지만, 그런 대사들만을 뽑아 극본을 만든 톰 포드의 능력도 대단하다.

물론 대강 줄거리에 따른 기억에 남는 포인트는 세 가지지만, 인상깊은 것들은 그보다도 더 많다. 두려움이나 경험에 대해 조지가 내린 정의, 케니의 삶에 대한 철학, 조지와 비슷한 상실을 경험했지만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찰리의 대사 등등... 스포일러를 줄이려 느낌과 감상들을 상세하게 적지 않았다. 결코 이 영화가 이 정도의 느낌만을 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 다시 강조하고 싶다.

블로그의 정보

심심해, 리비

리비 :)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