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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후 Doctor Who | BBC

by 리비 :)

스포일러 주의


12대 닥터가 된 피터 카팔디가 내한했을 때 일이다. 업무 때문에 닥터후를 좀 보려고 집에 와서 TV 앞에 앉았는데, 사람 눈이 간사해서, HD방송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또릿또릿 명료명료 화려화려한 화면이 아니면 보기가 싫은거다. 거기다가 영국과 SF 특유의 분위기가 만나 세트며 외계인 분장이며 어찌나 다 눈에 설던지. 그래서 껐다, 보기 시작한지 5분 만에. (사실 업무라고 해봐야 케이크 소품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왕 만드는 김에 비슷하게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에서 보려했을 뿐이다.) 그냥 이 이야기 나오면 가만히 있어야지. 이거 안 봐도 일은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슈가케이크를 내가 직접 만드는 건 아니잖아. 사실 그 때 마음이 그랬다. 몇년 전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드라마를 정주행 중이다. 정말 뜬금없이, 아무런 계기없이!


계기가 없다고 했지만, 뭐 항상 그렇듯 kt의 농간이다. 프라임무비팩을 뒤적거리다가 리스트를 쭉 내려봤더니 닥터후가 있어서(...) 보기 시작했다. 시작은 맷 스미스의 11대 닥터가 나오기 시작하는 시즌5 에피소드1이었는데, 보다보니 10대 닥터가 궁금해서(정확히는 리버송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 결국 10대 닥터 재생성 직후를 다룬 시즌2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부터 열심히 보고 있다.



이 드라마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뭐니뭐니해도 캐릭터 덕분이 아닐까 싶다. 뉴시즌1의 9대 닥터는 모르지만, 뉴시즌2부터 출연한 데이비드 테넌트의 10대 닥터는 비인간적으로 인간적인 닥터다. 요즘 영상콘텐츠를 보면서 가슴이 찡한 적이 많이 없었는데 10대 닥터의 행동을 보면서 내가 무섭고, 마음이 아프고, 때로는 경탄할 수 있었다. (물론, 데이비드 테넌트가 잘생겼다.)


호기심 넘치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닥터는 인류는 물론이고 어려움에 처한 외계종족은 모두 도우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일족을 위험에 몰아넣고 은하계를 위협하는 달렉에게도 구해주겠다며 손을 내밀 정도다. 그러나 닥터의 양보와 용서를 틈타 타 종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폭력적인 일부 종족에게는 가차없다. 영원을 살고 싶어 어린 소년들을 위협했던 외계종족에게 정말 독하게 영원한 벌을 내린 에피소드는 닥터의 냉정함이 그대로 반영됐던 에피소드다. 아, 이 회차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출연한 젊은 배우 하나가 <왕좌의 게임>에서 금 뒤집어 쓰고 죽었던 대너리스 오빠고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 나왔던 호킹박사 친구라 기억이 난다. 그나저나 이 배우랑 <이미테이션 게임>에 나온 매튜 구드랑 가끔 헷갈린다. 특히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을 다른 영화에서 각각 하면 아주...;;;


여하튼, 부족하고 어리숙한 인류와 어려움에 처한 모든 외계종족을 보듬는 모습이 참 멋지다. 처음엔 단호하고 엄한 모습이 좀 더 많았던 닥터가 점점 더 호기심과 애정어린 눈으로 인류를 보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길고 긴 드라마를, 그 중 데이비드 테넌트가 연기한 10대 닥터의 3개 시즌을 일주일 간 밤낮을 볼 수 밖에 없게 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일단 드라마를 계속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에피소드는 바로 11대 닥터가 나온 시즌5 2화 <The Beast Below> 이거 보고 될 수 있으면 이 시리즈를 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용을 다 적으면 이 에피소드가 너무 아까우니 생략한다. 


또 하나는 시즌4의 10화인 <Midnight>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위기에서 인류를 구해줬는데, 인류가 닥터를 죽일 뻔 했던 에피소드다. 닥터후를 보면서 사람인 내가 무섭고 약간은 내가 사람인게 부끄러웠던 내용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에피소드 시나리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봐야 100% 즐길 수 있어 그 내용을 굳이 적지 않는다. 각본과 연출, 연기가 모두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생존 앞에서 가장 비열했던 어떤 인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는 닥터의 표정이 눈에 아른아른하다. 그 힘든 하루를 견디고 컴패니언인 도나를 만나러 가는 모습도 참 안쓰럽고... 하루에도 몇 번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고, 폐를 끼치지만 그래도 착하게 사려고 노력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회차였다.


다른 하나는 시즌3의 10화인 <Blink>인데, 이 작품은 각본의 승리인 것 같다. 일상이고 별거 아닌 '조각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상상해 냈다. 달렉만큼 매력있는 악당 캐릭터는 아니지만, 일단 나오면 분위기가 으스스한 위핑엔젤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생명체가 보고 있을 동안은 움직이지 않지만 관찰하는 이가 없을 때는 (눈을 감거나 불이 꺼져 보이지 않는 등) 시간에너지를 빨아먹기 위해 돌진하는 종족이다. 시간에너지를 빨린 생명체는 원래 살던 시간대를 떠나 과거로 떨어져서 살아가게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재 시간대가 과거에 영향을 미치고, 이 영향이 현재 상황의 인과가 되는 SF요소를 하나의 이야기로 잘 풀었다


닥터후가 SF장르라 기계, 괴물, 외계종족에 다양한 분의기의 소품과 세트가 등장하는데, 이 에피소드에서는 타 에피소드에 비해 특이한 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의 매력이 여기서 나온다. 그래픽이 사용되면 화려하고 몰입도는 높아지는데, 몰입도와 살짝 다른 '뭔가'는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보고 있을 때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위핑엔젤의 특성으로 그래픽 사용은 줄이고 극적 긴장감은 높였다. 이 에피소드는 처음 본 저녁에 2번을 다시 봤다. 다 읽어버리기 아까워서 아껴 읽었던 책은 종종 있었는데, 보기가 아까운 드라마 에피소드는 처음이었다. 이건 생각나면 진짜 여러번 다시 보게 될 듯...


나중에 시즌5인가, 맷 스미스의 11대 닥터에서 아예 움직이는 모습이 구현된다. 참 사람 심리가 이상한게, 오히려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는게 덜 무섭다.


여하튼 닥터가 바뀔 때마다 캐릭터의 성격과 배우가 달라지니 시리즈를 다 보게 될거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이 시리즈의 매력은 명확하다. 매회 상상력을 뛰어넘는 다양한 외계종족이 등장하고, 그에 맞춰서 다양한 화면을 보여주며, 때로는 반성하고 때로는 뿌듯하게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매력적인 성격의 환상, 닥터가 있고 현실에 발붙인 컴패니언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캐릭터는 모든 콘텐츠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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