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떠나간다.

by 리비 :)

만년필은, 특히, 펠리칸 m400과 같은 경성 금촉은 길들이는 재미가 있다. 내 필기 습관에 맞게 촉이 갈린다. 처음에는 좀 불편해도 1년, 2년을 매일 종이에 쓰다보면 어느새 내 손에 맞춰지는게 만년필의 매력이다. 그래서 만년필은 남에게 빌려주는 게 아니라고 했다. 필기각이 달라 생기는 문제야 오랜 시간 사용하는게 아니니 걱정할 바 아니다. 단지 보통 사람들이 만년필에 익숙치 않아 손에 무리하게 힘을 주고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면 닙이 비틀리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만년필에는 부담이 된다.



내가 쓰던 만년필이 바로 m400이었다. 작은 사이즈에 여성들이 써도 손에 부담이 없는 사이즈의 펜이다. 게다가 플린저 방식(본체에 잉크를 저장하는 방식)이라 자주 잉크를 채워줘야 하는 부담도 적다. 3일에 한 번 가량을 채워주면 되니, 컨버터 방식(본체와 분리되는 컨버터라는 잉크통에 잉크를 주입하는 방식)보다 편했다. 덕분에 고시용 펜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델이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보는 사람들이 쓰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다. 글씨체가 더 예쁘고, 글씨를 쓸 때 팔에 힘도 덜 들어가니 선호하는 고시생들이 있다.


여하튼 쓰던 펠리칸 펜을 떠나보냈다. 항상 사용했던대로 쓰려고 손에 쥐니 푸른 얼룩이 묻었다. 가방 안에도 푸른 얼룩이 생겼다. 만년필이 일으킨 말썽이었다. 자세히 보니 캡에 금이 가 있었다.


언시 공부도, 일본소설 필사도, 매일 쓰는 일기도, 그리고 최근 중국어 공부도 이 펜으로 했다. 스케쥴러도 이 팬으로 적었다. 연필 다음으로 많이 쓰는 필기구였다. 립스틱 챙겨나오는 걸 잊고 나오는 날은 있어도 이 펜을 잊은 적은 없었다. 4년이다. 내게는 짧지 않은 시간인데 만년필에게는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몇 번 바닥에 떨어트렸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말썽이 생겼다. 요즘 애정이 덜하다는 걸 눈치라도 챈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선물을 받은 펜이라 마음이 금간 것 같이 더 아프다. 이래서 내가 선물받은 물건은 잘 안 쓰는데...


하다못해 물건도 애정도가 떨어지는 듯 하면 자취를 감추고, 고장을 일으킨다. 사람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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