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꽃이 피었다

by 리비 :)

아주머니께서 무려 2주일 휴가를 내셨다. 쓸고 닦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엄마는 오랜만에 돌려보는 세탁기에 무려 '사용설명서'를 꺼내셨다. 같이 옆에서 읽어봤다. 요즘 세탁기는 너무 좋아져서 정말 설명서 없이는 그 많은 기능을 다 알 턱이 없었다. 어차피 읽어봐야 다 잊어버릴 걸, 꼼꼼히도 읽었다. 


어지간한 직장인들이 다 그러하듯, 일요일에도 일은 남아 있다. 토요일은 어지간하면 자체 휴무로 삼아 사사로운 일을 본다. 일요일에는 간단한 산책을 하며 엄마와 시간을 가진 후, 남은 업무를 한다. 사실 토요일에도 했어야 하는 일들이 밀려 하다 보면 새벽이다.


여차저차 어디에도 올라가지 않을, 하지만 써야 하는 글을 쓰다보니 방바닥이 2~3일 안 닦은 티가 났다. 내가 딱히 깨끗한 편은 아니지만, 정말이지 이런 바닥은 싫다. 고실고실하지도 않은 느낌이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시끄럽지 않은 핸디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를 빨아와서 방바닥을 쓱쓱 닦고, 노랑색 양말을 신고 책상 위에 다시 앉았다. 그러고 나니 참기 싫었던 짜증이 사라졌다. 귀를 긁던 시끄러운 초침 소리도 사라져서 참 조용하기까지 하다. 이런 느낌 좋다.


낮에는 바람이 좋아 산책을 갔다. 15분 거리에 있는 백화점 앞 노천 카페에 앉아 커피 하나를 시켜놓고 엄마와 잡지책을 읽었다. 화보 속의 구하라를 보면서 '구하라는 지구를 구해서 이렇게 이쁘나'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약간 찬듯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노천카페에서 틀어준 노래는 좋았다. 볕은 좋았고 바람은 시원했다. 이 역시 좋았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런 상황에서 좋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에 항상 치여 있었다. 공부를 해야만 했고, 취직을 해야만 했고, 취직해서는 또 계획이 있었다. 가지지 못한 것만 보였다. 그러다 보니 현재는 없고 항상 미래만 있었다. 가능성만 좇아 시간만 보내는 그런 상태 말이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일단 하고 이불 속에서 하이킥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당장 착수했다. 그러고 나니 현재에 충실하며 행복해질 여지가 생긴 것 같다. 누군가가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갔다. 지금 있는 여지를 싹 비우고 나니, 현재에 충실하며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베란다를 봤는데 꽃이 피었다. 작년 이맘때 쯤 꽃이 핀 모습에 매혹돼 산 화분이다. 딱 1년 만에 그 때만큼이나 예쁜 꽃이 피었다. 그리고 키가 좀 더 자랐다. 이 화분이 꽃이 필 줄은 몰랐다. 병원에 있는 화분에도 꽃이 피었단다. 평소보다 이르게 단지 내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개화했다. 수수꽃다리도 향기가 짙다.


정말이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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