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첫 단추

by 리비 :)


팔걸이에 단추가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에 앉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건반에 손을 올리고 숨을 들이 쉬어도 보이는 것은 없다. 첫음을 누르는 찰나, 그 때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쉽지 않겠구나.'


첫 단추를 끼우기 전에 알 수 있는 건 없다. 일이 잘 될 것인지, 아니면 어려울 것인지 알 수 없다. 첫 글을 써서 내 놓아 봐야, 첫 건반을 눌러 봐야, 첫 발걸음을 내딛어 봐야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한다. 그나마 다행이고 불행인 것은, 그 감도 잘 맞지 않는다는 거다.


아기새는 첫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나혼자 산다'가 방송 중일 때 귀가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 방 앞에서 잠깐 서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할 말이 있는데 들어와서 말하기는 어려울 때. 잠결에 들린 발소리가 딱 그 박자였다. 아기새의 분야는 나와 다르고, 내가 조언해 줄 건 없다. 그냥 들어주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고, 마음 상하지 말라고 해주는 수 밖에는.


다만 아기새야. 첫단추 여미기가 어렵다고 일이 다 어렵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더라. 첫단추 잘 채웠다고 일이 다 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듯. 지금 첫 발걸음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그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아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탓하거나 마음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항상 좋을 수는 없더라.


'오늘 쉽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한 날, 콩쿨에서 첫 건반을 누르고 다음 건반을 누를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한 박자만 눌러야 하는 첫 건반을 세 박자를 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망한 김에 음이음표 다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치고 내려왔다. 당연히 그 콩쿨에서 상은 못 탔는데, 나중에 선생님이 타박하시며 웃으셨다. "니 곡 치는 것 같은 느낌 참 좋더라. 아깝네."


지금 아닌 것 같아도 마음 상할 필요 없는데. 그래도 그게 쉽지 않을테니 참 마음이 아프다. 우리 아기새는 나에게 때로는 오빠같은, 때로는 귀여운 동생인데 나는 이럴 때 든든한 형이 못 되어줘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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