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d Notebook

#1 My Camus; The Almond Trees

by 리비 :)


알베르 까뮈의 에세이, 여름 중 '아몬드나무'를 우리말로 옮김
영어와 통번역 전공자가 아닌 관계로 의역이 넘쳐나고 오역이 많을 수 있습니다.

branches with almond blossombranches with almond blossom, Gogh


The Almond Trees 


"알고 있나?" 나폴레옹이 어느 날 폰타네[각주:1]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놀라게 하는 것 말이네. 어떤 것을 이루는데에 있어 무력은 무능력하다는 점일세. 세상에는 두 가지의 힘, 무력과 정신이 있지. 결국에는 정신이 무력을 정복하기 마련이네."


위와 같이 정복자들은 이따금 감상적이 된다. 그들이 드러냈던 칼에 대한 과한 자만심의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여 년 전에 칼이 가졌던 진실이 오늘 날의 탱크라고 해서 똑같을 수는 없다. 나폴레옹이 득세하는 동안, 분열된 유럽은 지성 없는 치졸한 침묵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끔찍한 전쟁이 펼쳐지던 시기에도, 네덜란드의 화가는 그런 세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농장에서 수탉을 그릴 수 있었다. 플랑드르의 전쟁을 잊은 것처럼, 백년 전쟁도 잊혀졌다. 그러나 사일리지언 기도자와 같은 기도하는 사람은 여전히 몇몇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날, 모든 것은 바뀌었다. 화가든 기도자든 징집된다. 우리 모두 세계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정신은 칼을 든 정복자마저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던 장엄한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정신은 이제 힘을 저주하면서, 그것을 다시 정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몇몇 숭고한 영혼은 이런 세태를 악한 세상이라며 개탄한다. 우리는 정신이 힘을 정복하지 못하는 이런 세상이 악한 것인지까지는 잘 몰라도, 사실이라는 점은 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견뎌 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칼 앞에 무릎꿇지 않는 것, 정신을 따르지 않는 무력이라면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을 원한다.


이런 과업의 끝은 없다는 것, 이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추구해나가기 위해 이 세상에 있다. 나는 과거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철학이나 인간은 더 나아감을 향한다는 믿음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운명에 대한 자각은 절대 진보를 멈추게 하지는 않을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더 잘 알게 되었음에도 아직 극복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모순됨 속에서 살고 있고, 이러한 모순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과 모순을 줄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운명은 자유로운 영혼들의 비통함을 줄이기 위한 몇 가지의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찢어진 것들을 다시 꿰매야 하고, 너무나도 명백하게 부당한 것 속에서 세상이 정의로운 것을 다시 상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세기의 고통에 중독된 사람에게 다시 행복의 의미를 찾아 주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초인간적인 과업이다. 하지만 '초인간적'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내야 할 때에 쓰일 뿐이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를 상기하고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자, 힘이 우리를 꾀어내기 위해 자비롭고 사려깊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절망은 우리가 제일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것이다. 이 세상에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외치는 사람의 말도 듣지 말자. 문명은 쉽게 죽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세계가 붕괴 직전에 있더라도, 제일 먼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극과 절망을 헷갈리고 있다. 로렌스가 말했다, "비극은 비참함을 걷어 차버리는 위대함일 것이다."라고. 이것이 건강하고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생각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발로 걷어찰 것들이 참 많이 있다.


내가 알제리에서 지낼 때, 나는 겨우 내내 끈질기게 기다렸다. 밤의 길목, 차갑고 시린 2월의 그 밤에 아몬드나무에 흰 꽃이 뒤덮이기를. 그 때, 나는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바람과 빗줄기 속, 눈 빛의 연약한 꽃송이를 보며 경이로워 했다. 풍우 속에서도 매년 꽃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대로 가지에 맺혀 있었다.

여기에 비유나 상징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비유나 상징을 통해 행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비유나 상징보다 훨씬 현실적인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불행으로 가득한 유럽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명력 넘치는 온전하게 빛나는 그 땅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다. 나는 그 곳이 사색과 용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선택받은 곳임을 잘 안다. 그 곳을 떠올려보자. 나를 가르치는 그 곳을. 우리가 마음을 구휼하기 위해서는, 이 땅이 지닌 우울한 미덕을 잊고 오로지 이 땅이 가진 생명력과 경이로움을 경배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불행에 중독되어 이 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순전히 니체가 피로의 그림자[각주:2](the spirit of heaviness)라고 불렀던 그 악함에 굴복한 것이다. 마음의 피로감을 더하지 말자. 정신의 부재에 울지 말자. 정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신이 승승장구하는 미덕은 어디 있을까? 니체는 그것을 피로의 그림자의 숙적이라고 칭하며 다음을 꼽았다. 성격의 힘, 취향, 우리가 속한 세계, 고전적인 의미의 행복, 강인한 긍지, 현명함의 차가운 절제가 그것이다. 그 어느때보다도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미덕은 참 필요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커다란 선택 이전에, 그 누구도 성격의 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 연단 위에서 보여주기 위한 친절함, 호기로운 인상과 제스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속에서도 굳건히 서있는 순수함과 생기의 자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찬 겨울 속에서 과실을 준비하는 성격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뭇가지'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아몬드나무와 그것의 꽃을, 고흐가 조카 테오와 그의 아들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테오는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조력자였습니다. 테오는 아들에게 사촌형 고흐의 이름을 따서 붙일 정도로 고흐를 잘 따랐고, 고흐의 생계유지에도 큰 힘을 보탰다네요. 그런 테오에게 고흐는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테오의 고마움에 답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편지로 표현하기도 했었고요. 그런 테오를 위한 고흐의 그림입니다. 그 마음과 좋은 것만 담긴 기운을 마음에 품는 것 같아 방에 프린트를 걸어둔 작품이기도 하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런 작품의 주제를 공유하는 제목을 덕분에 까뮈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읽어봤습니다. 까뮈 역시 세상이 돌아가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며,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이 글을 세상에 내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흐의 일생을 보면 광기어리고 한탄만이 가득한 그림이 나왔을 법 한데, 정작 그림에는 오랜 관찰을 통해 생겨났을법한 사물의 해석과 아름다운 색채가 인상깊은 그림이 많습니다. 형이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가겠다고 했던, 그래서인지 고흐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건강 악화로 뒤따라간 테오의 존재 덕도 어느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요.


까뮈가 글에서 잠깐 말했듯, 결국엔 사람, 사람만이 남는 것 같습니다.


  1. Fontanes 프랑스의 문인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폰타네(퐁탄)를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그 밖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2. 정확하게 니체의 책을 봐야 이에 걸맞는 단어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를 읽어보지 못해서, 그냥 문맥 상 제가 받아들였던 의미대로 적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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